숨김과 드러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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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 숨김과 드러냄

[edit] 전자주민카드와 프라이버시권

전자주민카드의 시행과 저지의 문제에 있어서 현재까지 형성된 최대의 쟁점은 '행정적 편의'와 '프라이버시권의 보호' 사이에 놓여 있다. 여기서 프라이버시권은 두 가지 역할을 해내고 있다. 우선적으로 침해되는 대상으로 실정됨으로써 전자주민카드의 부당성을 설명하는 준거가 된다. 다음으로, 단순히 침해되는 대상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어떤 목표로서 상정됨으로써 전체적인 방향을 긍정적으로 설정하는 깃발이 된다. 프라이버시권의 이러한 두 가지 작용과 역할에 따라 전자주민카드에 대한 전체적인 운동의 방향은 첫째, 전자주민카드 시행 계획읜 전면철회, 둘째, 프라이버시권 보호를 위한 법률 제정으로 요약된다. 그 논리적 현실적 힘과 효과야 확인되어야 할 바이지만, 지금까지의 운동들(대부분의 외국 사례들, 대책위로 결집된 한국의 대응)에 있어서 프라이버시권은 전자주민카드 혹은 일반적으로 말해 '데이터베일런스(data+surveillance)'의 문제를 다루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 프라이버시권이 거의 유일한 중심축을 형성하고, 같이 따라 들어오는 문제들 ─ 예컨대 기술ㆍ권력의 문제, 감시ㆍ통제의 문제, 행정의 문제, 국가ㆍ시민사회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 등 ─ 이 그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한에서 현재의 운동은 내적으로 (최소한 형식상으로는)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데, 다름 아니라 과연 프라이버시권이 논리적, 현실적으로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잠정적으로 '논리적인 힘'과 '현실적인 힘'을 구분하자. 논리적인 힘의 문제는 프라이버시권이 전자주민카드에 대해 동시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얼마나 구성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가, 그에 따라 얼마나 역동적인 저항의 공간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는 구분되는 현실적인 힘의 문제는 말 그대로 한국의 역사적 상황 지평에 대한 판단 속에서 프라이버시권이 얼마나 효과적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힘에 대한 분석과 판단은 전자주민카드에 대한 현재의 대응이 프라이버시권을 중심으로 하는 한에서, 그 대응 전체의 정치적 생명력에 대한 판단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프라이버시권이 전자주민카드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정세적으로' 불가피하게 요구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버시권의 논리적, 현실적 빈공성을 지적할 것이다. 프라이버시권이 정세적으로 요구된다는 것과 그 요구를 주체적으로 어떻게 의미화 해내는가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적은 단순한 반성 행위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직접적으로 운동 그 자체이며, 프라이버시권의 불가피성과 빈공성에 대한 판단도 운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프라이버시권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운동에 대한 이러한 발언은 곧 전자주민카드라는 하나의 사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단순한 사안으로부터 사회적 문제제기로 나아가는 경로를 살피는 우리의 판단에 대한 발언이다.

[edit] 숨김의 정당성과 불충분성

보드리야르가 소비사회와 대중매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하나의 결론은 '외설적인 것'의 범람이다. 사물의 내재적 자립성을 대체하는 기호의 질서의 완벽한 구축 속에서, 현실 세계를 대체하는 하이퍼─리얼의 세계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일의적인 시공간성과 의미와 메세지 속에서, 사물들은 '전시가치(展示價値)'로만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 때 그에 따르면, 정치의 종언, 역사의 종언, 상상의 종언, 신체의 종언 등 여러 가지 종언들과 함께 '비밀의 종언'이 선언된다. 비밀과 심층, 내면을 숨기지 못하는 사태, 그것도 어떤 부분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전 부면에서 비밀과 심층과 내면이 아예 불가능한 사태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외설성이란 보여진 사물의 절대적 근접성, 시선의 화면 안으로의 매몰이다. 클로즈업되고 거리를 둘 수 없는 규모의 하이퍼비전, 시선과 시각 대상 사이의 총체적 뒤섞임, 매춘이다."


물론 이것은 포르노그라피의 은유이고 이미지화다. 그런 만큼 이 은유와 이미지화를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또 받아들인다면 어떤 수준에서 어떤 의미화를 통해 그러할 것인 지의 여부는 확정적이지 않다. 특히 보드리야르의 은유와 이미지화가 전면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또한 기호의 과도한 증식과 범람을 통한 '내파(內波)'라고 하는 사회적 삶의 극단적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용의 여부는 더욱 불확실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은유와 이미지화는 거부하기 힘든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 진실은 단순히 말해 비밀, 심층, 내면을 나타내는 한에서 '사적인 것'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한국에서 나타나려는 참이다. '세계 최초'를 자랑삼는 '전자주민카드'의 시행이다.


전자주민카드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분명 '행정적─기술적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대립이다. 그것도 균형적인 대립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의 현존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데까지 이르는 방식의 대립이다. 개인의 모든 삶은 행정적─기술적 시스템 속에서 수치화되어 저장되고 유통된다. 더구나 개인은 자신의 삶이 그러한 방식으로 처분된다는 것에 대해 도대체 인식, 접근할 수 없다. 이렇게 개인의 사회적 삶이 이 행정적─기술적 시스템 바깥에서 자신의 공간을 형성할 가능성이 봉쇄된다면, 개인의 현존은 사라진다. 하나하나의 사람들을 개인이라 불러줄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거의 언제나 '분리된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분리'라는 단어에 결부된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 분리란 각 개인의 유일성을 구성하는 어떤 '거리의 산출'이다. 즉 개인이란 고립된 섬이라는 통상적인 수동적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스스로 차이와 분열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극복해가는 방식으로, 그림으로써 자신의 내재적 자립성을 유지하고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전자주민카드가 만들어낼 일의성(一意性)과 무차이성은 바로 개인의 내재적 자립성을 박탈할 때만 성취된다.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이 허용하는 유일한 코드가 먼저 있고, 모든 개인들이 그 유일한 코드의 어느 한 자리를 단순히 차지할 뿐이라면, 개인들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가능한 추상물로 전락한다. 인간이 사물화될 뿐만 아니라, 사물 역시 탈사물화된다. 내재적 자립성이란, 그것이 만들어내는 고유성이란 인간 존재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 방식이이고 하기 때문이다.


전자주민카드가 만들어낼 이러한 결과가 프라이버시권이 제기되는 정당성을 말해준다. 프라이버시권은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에 의해 침해되며, 극단적으로는 개인이 소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멸할 운명에 처한 것으로 설정된다. 이에 따라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것으로 설정된다. 우리 역시 동의한다. 단순히 말해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에 의해 개인의 내재적 자립성이 완전히 박탈되는 상황을 견디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삻이, 우리의 삶들이 동일한 무거리성의 물결 속을 떠밀려 다니는 상황은 얼마나 단조로운가? 아니 얼마나 섬뜩한가?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에 대한 개인의 접근이 원척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따라서 프라이버시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그런데 프라이버시권은 개인의 현존 자체의 존폐라는 사안의 범위와 중량감에 비해 좁고 가벼워 보인다. 단순히 프라이버시권이 가지고 이는 내재적 한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질문을 해보자. 개인의 내재적 자립성과 프라이버시권이 형성하는 지평은 얼마나 동일근원적인가? 프라이버시권의 지평은 개인의 내재적 자립성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는가?


프라이버시권은 그 가장 명확한 한정에 있어서 "개인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 3자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정의된다. 이 정의를 형식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권리의 주체로서의 '개인', 그 권리가 실현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정보', 그리고 그 권리가 실현되는 방식으로서의 '스스로 결정'이다. 우선 권리가 실현되는 방식으로서의 '스스로 결정'에 대해 살펴보자.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곧 권리 주체의 자율성을 표현한다. 이 자율성의 맥락에서 프라이버시권은 '데이터베일런스(data+surveillance)'에 저항한다. 즉 개인은 자신의 자율적인 판단에 입각해, 제 3자가 비록 국가일지라도, 자신에 대한 정보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율성이 그 본질상 자기자신 강화 이외에는 어떠한 외부적 목적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프라이버시권은 국가적 수준에서 강요되는 어떤 정당화의 기제에도 저항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국가에 의해 개인적(시민적) 편의와 등가적으로 선전되는 행정적 편의에 대해 그 등가성을 의문에 부칠 수 있으며, 오히려 시민적 편의와 행정적 편의의 대립을 산출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과 제3자, 자기자신과 외부적 목적, 개인적(시민적) 편의와 행정적 편의 사이의 대립을 산출하는 자율성의 논리적 힘은 대립의 산출까지다. 다시 말해 프라이버시권은 그 대립을 어느 수준에서 제기하는 것인지, 따라서 그 대립을 통해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지를 확정짓지 않는다. 아니 확정지을 수 없다. 스스로 결정이란 그 주체의 일반적인 존재방식과 그 속에 끌려들어오는 하나의 문제로서의 대상에 의해서만 실질적 내용과 힘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결정'에 맹목적으로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우리는 개인의 자율성을 옹호하며, 개인의 현존 자체를 소멸시키는 전자주민카드의 문제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옹호여부의 문제와 달리 그것이 어떤 것이며, 또한 실현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 것인 지의 문제는 여전히 해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남아 있고, 옹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남아 있다. 자율성이란 당연한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으로 전제되었을 때 그것은 한갓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라이버시권의 문제에 있어 자율성에 어떤 함량을 부여할 주체와 대상, 즉 개인과 정보의 문제로 넘어가자.


특정 권리의 실현이 언제나 개인을 경유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개인을 말하는 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프라이버시권에서의 개인의 지위는 다른 일반적인 권리에서와는 차이가 있다. 이 때의 개인은 단순히 개체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어반복인 것처럼 보이지만, 프라이버시권이 말하는 개인은 명백히 '사적 개인'을 지칭하고 있다. 즉 권리의 실현이 개인을 경유한다는 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현이 개인'에 대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개인, '사적 개인'이란 자신의 외부에 '공적 개인'과의 대립을 전제하고서야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립은 개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분명하다. 시행된다면 전다주민카드에 담길 각종의 정보들 ─ 형사사건 정보, 사회복지 관련 급부행정 정보, 주민등록 기재 사항, 군사 정보, 교육기록 정보, 고용기록 정보, 소비자활동 정보, 금융, 세무 정보, 의료, 보험 정보 등 ─ 은 통합 전이든 후이든 상관없이 이미 '공적인' 방식으로 수집, 보류, 이용되고 있다. 이것은 정보의 보유자, 아니 정보의 대상으로서의 개인이란 더 이상 사적 개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정보들이 그 자체로, 즉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해썬 것들이 아니라, 수집, 보유, 이용과 관련된 메카니즘에 의해 '창출'되었다는 점이고, 따라서 그 대상인 개인 역시 공적인 방식으로 창출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율성이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 3자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허구적이다. 만일 프라이버시권과 그것이 전제하는 사적 개인이 어떤 긍정적인 대립을 산출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도대체 그러한 정보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을 때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보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이란, 정보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이미 주도성을 상실하고 있는 개인의 지위를 '사적'이라는 이름 하에 보호 혹은 은폐해보자는 것에 불과하다.


정보란 무엇인가? in─form─ation이다. 즉 어떤 무형의 것을 어떤 형태 안에 집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어넣는', '형성하는' 활동과 주체와 가치체계와 방법론을 전제하지 않은 정보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보란 사물 '외적으로 ' 주어진 형식 속에서 매개되고 정리되는 내용이다. '외적'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어떠한 사물도 무형의 것으로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보는 자신이 개입하여 산출하기 전의 그 무엇을 무형의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정보가 사물을 자신의 형식으로 집어넣는다는 것이 그 사물의 내재적 자립성을 파괴함을 전제한다는 점을 은폐함을 뜻한다. 사물이 정보로 산출되고 재산출될 때, 산출된 사물과 세계는 이전의 존재론적 지위를 잃어버린다. 사물의 세계는 자립적 구속력을 잃어버리고, 정보를 정보로서 산출하는 형식적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어떤 기호가 된다. 사물은 이미지, 표상, 부호가 된다. 이미지와 기호로서의 사물은 매체 기술의 무한한 조작 가능성 안에서 표피화되고, 그 무한한 확대 재생산 가능성 안에서 실재로서의 고유성을 상실한다.


그렇다면, "개인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 3자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라는 프라이버시권은 이미 성립될 수 없는 권리인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삶을 살고 있는 어떠한 개인도 스스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산출하지 않았다. 농담같지만, 개인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 3자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ㅇ린가를 고민하고 있는 동안 그 정보를 산출했던 제 2자는 이미 그 정보를 '알고' 있다. 형성은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조건을 전제한다면, 주민등록사항과 군사관련 사항, 형사 관련 사항, 세무관련 사항에 있어서 정부는 개인에 대해 제 2자이며, 교육 관련 사항에 있어서 학교는 개인에 대해 제 2자이며, 고용과 소비 관련 사항에 있어서 기업은 개인에 대해 제 2자이며, 의료 관련 사항에 있어서 병ㄹ원은 개인에 대해 제 2자이다. 그렇다면, 제 3자란 단순히 각각의 사안에 있어서 정보의 직접적인 산출에 관여하지 않는 자에 불과하다. 이제 프라이버시권이 '자율성'을 통해 개입하고자 하는 문제의 범위가 보인다. 그것은 한마디로 '제한'이다. 그것도 정보의 산출 자체에 대한 제한, 즉 정보화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의 제한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보가 그 정보를 산출했던 영역을 ㄴ엄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의 제한이다. 영역이 명확히 한정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목적, 내용, 수집, 이용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권은 정보에 관련된 사항들이 제한되는 만큼에서 보호될 것이다.


충분한가? 단연코 '아니오'다. 우리는 이 불충분성을 '숨김의 불충분성'으로 특징짓는다. 프라이버시권이 아무리 자율성을 말한다고 하덜라도, 그 자율성이란 자신의 정보화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 아니라, 고작 자신,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숨기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성공할 가능성이 애초부터 봉쇄된 허구적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프라이버시권은 비록 그것이 전자주민카드라는 사안이 드러내는 문제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건드리고는 있지만, 그것들을 급진적으로 구성하여 제기할 가능성을 상실해버리고 만다. 자율성이 허구화되고 공허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사태의 오인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 오인은 단순한 무지라기 보다는 자신의 전제에 대한 무의식적 몰각에 의한 것이다.


이 오인과 몰각에는 운동에 대해 통상적으로 펴저있는 '현실적 감각'도 한 몫 한다. 운동이 자신의 성과를 얻어낼 곳이라고는 현실적으로 법률적 공간 외에 없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에 의하면, 개인의 자율성은 자신의 강화라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행정적 권력의 규모의 제한에 의해 상대적으롬난 가능해지는 것, 즉 결과로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자율성이 결과로 주어질 때, 그 결과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은 법률의 제정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법률적 체계의 형성을 위해 시민적 '운동'을 요구하더라도 마찬가진데, 시민적 운동이란 그 자체의 자율성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법률 체곙릐 수정 혹은 형성이라는 목적에 대한 하나의 유력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합리적 법률 체계 속에서 개인은 안정적으로 자신의 자율성을 보호받을 것이다. 그러나 줓레가 아니라, 정보의 산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으로서 말이다. 이러한 구도에 따른다면, 개인은 자신이 요구하는 바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요구를 관철시키는 방식에 있어서도 숨겨지고 만ㄴ다. 이러한 사태는 운동 자체의 정치적 생명력에 있어서 치명적이다.

[edit] 드러냄의 가능성

우리는 전자주민카드의 문제가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에 의한 개인의 현존 자체의 소멸을 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프라이버시권의 보호라는 요청이 그런 만큼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또한 프라이버시권의 요구가 다다를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가 '숨기의 가능성'이라 했을 때 그것은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그 불충분성이 외부적 조건에 의한 제한이라기 보다는 내재적인 한계에 의한 것이기에 치명적이라는 점도 아울러 지적했다. 이제 우리는 전자주민카드에 대한 우리의 문제의식을 '드러냄의 가능성'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우선 '드러냄'은 '숨김'이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고 더 이상 소급해서 문제제기하지 않는 두 가지 지점에 대한 문제화가 요구된다는 점을 표현한다. 이 두 가지란 '개인'과 '정보'이다. 프라이버시권은 도대체 개인이 현사회에서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전망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제기할 수조차 없게 만들다. 마찬가지로 프라이버시권은 정보의 현존 및 그것의 본질, 전화가능성에 대해 묻지 않는다. 우리는 전자주민카드의 사안에 대해 이 두 가지를 그 극단에까지 소급해 묻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드러냄'은 저항의 긍정적 공간이 프라이버시권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형성되어야 함을 표현한다. 프라이버시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은 좁고 얕다. 심지어 어떤 이율배반, 즉 자율성을 말한 뒤에 곧 그것을 부정하게 되는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기조차 하다. 긍정적으로 확보되어야할 것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형식적, 법률적 이해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권리의 확보 및 보호가 가능한 조건에 대한 탐색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드러냄'을 말하고자 하며, 그것으로써 운동의 일반적이고 최우선적 요구로서 '공적인 것에 대한 결정권'을 나타내고자 한다.


개인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또한 그 안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문제로서 정보에 대해 우리는 숨김이 아니라, 드러냄을 말한다. 드러냄은 나의 정보를, 당신의 정보를 서로에게 숨기지 말아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윤리적 요청이 아니며, 또한 개인들이 타자에 대해 완전히 투명해져야 한다는 비현실적 요구도 아니다. 개인은 그 사실을 가치적으로 부정하든 혹은 긍정하든 '분리된 존재'이다. 이 때의 분리란 고립이 아니다. 그 존재에 있어서 사물들 및 다른 개인들 곁에 머물지 않는 개인은 없다. 따라서 애초부터 고립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분리란 개인의 환원불가능성, 대체불가능성이다. 특정한 개인은 자신의 삶에 공속(共屬)해 있는 어떠한 사물들로도, 또한 다른 개인들로도 환원, 대체될 수 없다. 내재적 자립성이 없는 개인의 존재란 상상으로도 불가능하다. 내재적 자립성이 없다면, 더 이상 개인으로 불릴 수조차 없다. 개인은 스스로 대립적 차이와 분열을 산출해내며, 동시에 그 차이와 분열을 재통합하면서 존재한다. 바로 이 차이와 분열 및 그것들의 재통합은 개인에게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화'하고' 이 대타적 차이 속에 외면성을 '만들고' 그래서 이 외면성 속에서 스스로 모순과 소외를 '경험하는' 것이다. 차이내기 '운동'은 바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실행하는' 행위이다. 똑같이 그 차이의 산출 못지 않게 그 차이의 극복이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개인은 '분리된 존재'라기 보다 오히려 '분리하는 존재'이다. 분리하는 이 능동성을 개인들의 고립으로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 분리하는 능동성이란 애초부터 개인이 사물들과 다른 개인들과 공속하고 있음을 전제할 때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은 분리하는 능동성 속에서 필연적으로 매개하고자, 소통하고자 한다. 개인들은 불완전하고 결핍을 겪고 있으며 본성상 보충적이고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의타성과 보충의 필요성이 곧 개인들 간의 매개와 소통의 가능성을 허락한다. 이 때 매개와 소통이란 외부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유한성이라는 내적 본성에서부터 강요되며,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인 강요이다. 또한 유한성이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기에 끊임없는 강요이며, 끊임없는 차이와 분열 속에 놓여 있기에 결코 일의성을 허락하지 않는 강요이다.


그런데 정보란 어떠한가? 그 안에서 개인은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정보는 개인들의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다. 그것도 개인들의 내재적 자립성과 능동성을 파괴하면서 강요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 일의적 공간 내에서만 강요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적 본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강요되는, 능동적인 드러냄이 아니다. 외부에서 우연적이고 억압적으로 강요되는, 지극히 수동적인 드러내어짐이다. 이 때의 개인이란 정보의 일의적 공간이 허용하는 위치를 단순히 점할 뿐인, 그래서 무한히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추상물에 불과하다. 추상화되고 대체가능해질 때 개인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분리가 고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이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다른 이들과 조화롭고 친숙한 매개, 소통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개 및 소통은 분리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분리를 극복(?)하고 개인들 사이를 이러주는 듯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정보는, 오히려 그것이 형성하는 일의성으로 인해 매개와 소통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전자주민카드에 있어서 기본적인 구도는 행정적─기술적 시스템과 (분리가 아니라) '고립된' 개인이다. 이 때 관련은 시스템과 개인 사이에만 존재할 뿐, 개인들 사이에는 존재할 수 없다. 각 개인들은 시스템에 대해, 서로에 대해 무차별적이다. 이제 나와 당신은 분리되지 않는다. 즉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고립된다.


따라서 우리는 '정보화되지 않을 권리'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 말에 놀라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합리성을 가장하는 자, '정보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묻는 자를 경계하자. '정보화되지 않은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에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의 모든 사회적 삶이 정보를 경유하는 조건에서 정보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화되지 않은 권리에서 죽음을 보는 사람은 정보의 지배가 이미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정보는 그 완강한 형식성을 통해 매개와 소통의 유일한 방식으로 자처하지만, 그 유일성이 승인될 때 곧 매개와 소통은 불가능해지고 개인들의 사회적 삶은 죽음으로 내몰린다. 정보는 매개와 소통의 억압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보화되지 않은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숨기겠다거나, 다른 개인들과의 매개와 소통을 포기하겠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보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겠다는 의지이다. 숨을 권리에 대해 말해서는 안된다. 현존하는 정보를 두고서는 도대체 숨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개인이 자신이 정보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환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 환상을 실현하는 길은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것 밖에는 업기 때문이다.


드러내어짐이 아니라 드러냄의 가능성 정보화가 아니라 정보화되지 않을 권리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가능성을 일구어낼 저항의 공간은 어디인가? 미리 말한 것처럼 프라이버시권은 그러한 공간으로서 좁고 얕다. 프라이버시권은 비록 미약한 수준에서나마 정보의 일의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있지만, 그 일의성에 대립하여 긍정하여야 할 바를 명확히 하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확보되고 보호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형식적이다. 우리는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의 지배에 대한 저항의 긍정적 공간과 관련해서도 숨김이 아니라, 드러냄을 말한다. 이 때의 드러냄이란 개인의 존재방식과 정보에 있어서의 드러냄에 대해 말했던 것을 목적하는 개인들의 자율성이다. 이 자율성은 이미 존재하여 단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 자율성은 언제든지 발휘될 것으로 믿어지는 소위 대중의 역능이 아니다. 대중의 역능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역능이 발휘될 조건이 무엇인가, 또 어떠한 방식으로 발휘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율성은 자신의 고양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에도 자신을 수단으로 종속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자율성이 발휘되는 방식이다. 오해하지 말자. 자율성이 자신의 고양이외에 어떤 외적인 목적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율성은 자신의 고양이라는 유일한 목적에 따라 다른 것들을 그 '조건으로서' 세밀하게 평가하고 판단한다. 즉 자율성의 고양은 현실적인 조건들의 변형을 실질적인 목표로 삼을 수 있고, 삼아야 한다. 전자주민카드에 있어서 자율성의 고양이라는 목적은 정보화되지 않은 권리로 방향지워졌다. 그것을 위한 조건은, 확보되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핵심적으로 말해 그것은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의 파괴이며, 최소한 상대화이다.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의 절대성과 억압성은, 결국 권력은 그것이 개인들로부터 자립화되며, 자동화된다는 데 있다. 따라서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의 파괴란, 그 어감에도 불구하고 기계적 대상의 파괴가 아니라, 자립화 및 자동화라는 그것의 존재방식의 파괴다. 달리 말하면 그 파괴는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을 개인적 삶들의 결정권 속으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들의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드러냄들 속으로 행정적─기술적 시스템이 되돌려질 때 시스템은 더 이상 전일적 체계로서의 시스템이기를 그칠 것이다.


따라서 프라이버시권의 보호보다도, 어떤 역(逆)감시─통제 기구의 신설보다도, 이것들을 보장할 법률의 제정보다도 앞서 생각되고 요구되어야할 것은 바로 각 개인들의 삶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공적인 것'에 대한 개인들의 자율적인 결정권이다. 이 권리가 쓰여져야 할 곳은 어떤 법률 조항, 심지어 헌법 조항도 아니다. 이 권리는 개인들의 존재 자체에 거(居)한다. 이 권리는 어떤 기구나 법률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것들에 앞서 존재하며, 그것들을 초과해간다. 기구나 법률은 하나의 현실적인 목표일 수 있을지언정 결코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드러냄, 자율성, 결정권을 대중의 역능이라 부르든, 민주주의라 부르든, 아예 그냥 운동이라 부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역능과 민주주의와 운동은 자신을 숨기는 곳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곳에서 생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