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의 지문은 비자의 지문과 어떻게 다를까?

Guest 박쥐다
2008-06-23 15:55:57



"주민등록 안 하셨나요?"

열달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처음 듣는 한 마디입니다. 여권 정보를 조회하다 물어오시더군요. (지문과 안면사진을 디지털화해서 데이터베이스로 만든) 플라스틱 주민증 재발급에 제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나 봅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제 곧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있겠구나 반가운 마음 덕분이었을까요? 한 번 쓰윽 웃어 주고 대답했죠. "지문 찍기 싫어서요."

혼자서만 안 한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하지 말 것을 권하기까지 했던 저로서는 지문날인 주민증을 발급받지 않겠다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지나간 시절의 제 생각과 행동을 이제 와서 반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그 자존심도 많이 망가졌죠. 보시죠 한 번.

- 의정부 카투사 훈련소에서 군인 신분증을 만들면서 찍 소리 못하고 지문 찍어 줬습니다. 새 시대에 맞춘 2차원 바코드에 신원 정보와 지문 정보를 넣었다더군요. 정작 미군 부대 게이트에서 출입확인은 빡빡 머리 사진만 보고 하더군요. 참. 제대한 군인들의 지문은 지웠나 모르겠군요. 허허.
- 미국에서 공부하겠다고 비자 만들었습니다. US-VISIT 이란 외국인 감시시스템에서는 양쪽 손 둘째 손가락 지문과 얼굴 사진을 디지털화해서 보관하지요. 일본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하지요?
- 그 후 미국에 들어 올 때 마다 지문을 찍어 주고 있습니다. "Place your left index finger on the scanner. ... Right one." 곧 두 손가락 대신 열 손가락의 지문을 받는다고 하니 씁쓸하군요.  이 정도 되니 제가 한 때 한국에서 지문날인 반대운동을 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 군요.

"지하철에서 찍은 건 안 됩니다."

별 것 아니지만 기뻤습니다. 얼마 전부터 가까운 구청에서도 여권 발급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말이죠. 그랬기에 지하철 역 사진기에서 오줌 냄새를 참아가며 찍은 사진이 안 된다는 얘기를 젊은 공익 근무 요원에게 들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넘어질 뻔 하고. 출발역과 도착역을 바꿔 기차표를 예매하고. 뭐 그런 식의 실수 시리즈 중 하나라고 여길 수 있었거든요. 사진을 찍고, 기다려서, 받아, 마침내 여권 발급 창구 앞에 섰죠.

"아직 유효기간이 남았는데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음. 뭐 길게 설명하자니 제 시간이 아깝고. 그냥 넘어가자니 마음 한 켠이 퀭하고. 에라이 모르겠다. "앞으로 여권에 지문이 들어간다 잖아요. 전자여권이라고. 제가 지문날인에 민감해서요." 근데 이거 심상치 않습니다. 잠시 자판을 두들기시더니 또 질문이 날아와요.

"혹시 주민등록증 안 만드셨나요?"

뭐. 지금 생각해 보니 더 차근 차근 말씀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싶어요. 주민등록제도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변했는지, 지문 등록제도의 반인권적 측면은 무엇인지, 대체신분증으로 무엇을 쓰고 있는지. 전자여권은 비자 면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미국 비자 때문에 자주 지문 찍고 있다는 하소연도 해봄직 했겠죠? 그러나 정작 제 입에서 나온 말은 이랬습니다. "지문 찍기 싫어서요. 그래서 이렇게 여권 다시 만들잖아요."

담당자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자여권, 주민등록증을 되내이십니다. 이제 뭔가 알겠다는 눈치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겐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지요. 그렇게 제 알량한 자존심은 10년의 유예기간을 얻었습니다. 설마 그 때까지는 미국에서의 공부도 끝이 나 있겠지요. 물론 그 때까지 한국에 어떤 반인권적인 제도가 얼마나 많이 생겼을지 걱정됩니다. 제가 보인 선택적 민감성도 문제이군요. 예전에 가졌던 생각과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현실의 필요에 따르고 있으니 말이죠. 지문을 찍어 가며 하는 공부와 여행을 마칠 때쯤엔 제가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그 때쯤엔 속 시원한 일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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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su 2008-06-27 14:18:57

    "지문 찍기 싫다"는 원초적인 대답들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2. Guest Libisom 2008-09-28 13: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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